낙서장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요즘에 대한 기록.

sglee6484 2026. 3. 11. 20:52

요즘 들어 이상하게 모든 게 귀찮았다.

할 일이 없어서 늘어진 것도 아니고, 몸이 어디 크게 아픈 것도 아닌데 유독 손이 안 갔다.

해야 할 일은 쌓여 있는데, 막상 뭘 시작하려고 하면 기운이 빠졌다.

처음엔 그냥 내가 게을러진 건가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단순한 게으름이라기보다는 나를 움직이게 하던 단기적인 재미와 도파민이 한꺼번에 말라버린 상태에 가까웠다.

당장 본업만 봐도 머리가 무거웠다.

끝난 줄 알았던 프로젝트는 아직도 예외 케이스가 튀어나오고 있고, 운영 인수인계를 위해 문서도 정리해야 했다.

거기에 새 프로젝트 투입도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개발이 아니라 컨설팅 쪽이다.

인터뷰 질의서도 만들어야 하고, 교육자료도 준비해야 하고, 기준이 될 표준도 분석해야 한다.

문제는 이 영역이 나에게 아직도 막연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하필 맡게 된 분야는 시스템 안에 제대로 된 모듈조차 없는 영역이라 더 답답했다.

말 그대로 정답이 잘 보이지 않는다.

회사 안에서 오는 피로감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일은 늘 비슷한 사람에게 몰리고, 노는 사람은 늘 비슷한 방식으로 논다.
누군가는 계속 떠안고, 누군가는 계속 비켜선다.

이런 건 하루이틀이면 그냥 넘길 수 있는데, 반복되면 사람 마음이 묘하게 닳는다.

일이 힘든 것과는 또 다르게, 왜 이렇게까지 비효율적으로 굴러가야 하나 싶은 허탈감이 남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벅찬데, 사이드 프로젝트들도 조용히 줄을 서서 대기 중이었다.

음악은 만들어야 하고, 노래가 나와야 유튜브도 올리고 플레이리스트도 만들고 자동화해둔 상품도 묶어서 내놓을 수 있다.

뉴스봇은 고도화해야 하고, 트레이딩봇은 고쳐야 하고, 블로그도 써야 하고, 앱도 더 만들어보고 싶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보다 매끄럽지 않다.
비공개 테스트 기간도 필요하고, 결제를 붙이려면 사업자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따라온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 것들이 계속 생기는데, 그 “조금만 더”가 생각보다 길고 지루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게을러진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예전 같으면 신나서 붙잡았을 일들인데, 요즘은 시작하기도 전에 김이 샌다.

이상하게 뭘 해도 속 시원한 손맛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제는 의욕 자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당장 손이 가게 만드는 재미가 사라진 상태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코드를 짜면 돌아갔고, 자동화를 돌리면 결과가 나왔고, 뭔가를 만들면 내가 했다는 감각이 남았다.

그런데 요즘은 만드는 일보다 정리하는 일, 설명하는 일, 책임지는 일이 많아졌다.

문서화, 인수인계, 예외 처리, 인터뷰 준비, 교육자료, 분석.

이런 일들은 분명 중요하지만, 사람을 바로 움직이게 하는 단기적인 도파민은 잘 주지 않는다.

끝내도 “잘했다”보다는 “아직 이것도 남았네”가 먼저 온다.

주식도 비슷했다.

원래는 장을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는데, 요즘은 귀찮음이 먼저 왔다.

그래서 그냥 장기적인 포트만 다시 짜고 덮어두자는 마음으로 정리했다.

옵션만기 같은 이벤트가 있는 걸 알면서도,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면서 들여다볼 기운이 없었다.

내일이 지나면 한동안은 더 안 보려고 한다.
계속 쳐다본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솔직히, 이런 걸 속 깊게 털어놓고 편하게 한잔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친한 친구들도 이제는 다 각자의 삶이 바쁘고 가까이에 없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이야 있지만, 요즘따라 내가 조절을 잘 못하는 느낌이라 그것도 좀 위험하게 느껴졌다.

괜히 사람으로 풀겠다고 가까워졌다가 더 피곤해질 것 같은 감각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나를 좀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지금의 나는 의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것저것 나를 움직이게 하던 재미와 자극이 한꺼번에 흐려진 상태에 가까웠다.

본업에서는 불확실성이 크고, 회사에서는 사람 때문에 힘이 빠지고, 사이드에서는 완성감이 부족하고, 투자에서는 재미보다 피로가 커졌다.

글이나 음악 같은 창작도 예전처럼 시원하게 안 나왔다.

그러니 사람 마음이 쉽게 꺼질 수밖에 없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도 돌아오는 감각이 흐려진 상태였던 거다.

그래서 엊그제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엄청난 결심 끝에 시작한 건 아니다.

그냥 너무 답답해서, 기분전환이나 해볼까 싶었다.
어제는 코노도 다녀왔다.

별 대단한 해결책은 아니어도, 그렇게라도 좀 풀고 싶었던 것 같다.

막상 해보니 운동은 역시 단순해서 좋았다.
오늘 해야할 부위, 빈자리를 탐색하고 자세와 횟수에 집중하다보면 잡념이 들어올 틈이없다.

지금처럼 삶의 여러 영역이 다 흐릿할 때는 이런 단순한 반응이 오히려 사람을 붙잡아준다.

솔직히 말하면 술은 지금도 여전히 땡긴다.

머릿속에 떠 있는 일들도 잠깐 내려놓고, 복잡한 생각도 좀 흐려지고, 그냥 “아 모르겠다” 하고 한숨 쉬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오래 버티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그래도 뭐, 왜 이러는지는 이제 좀 알 것 같다.

의욕이 없어진 게 아니라 이것저것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거다.

일은 일대로 쌓이고, 술 한잔 땡길때는 다들 각자의 삶이 있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있어도 지금의 나는 그 관계를 잘 조절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당분간은 사이드 프로젝트니 뭐니 다 좀 멈추고, 본업만 챙기면서 쉬어야겠다.

다음 주쯤 날 좀 풀리면 야외에서 러닝이나 슬슬 해볼 생각이다.

지금의 나한테는 그런 정도가 더 필요해 보인다.